월야의 역사
월야의 역사
백제시대에는 다지련, 신라시대에는 다기현, 고려와 조선초에는 모평현에 속했으며 1409년(태종 9) 함풍현과 모평현이 합해져 함평현이 되면서 함평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지금의 월야면 지역에는 월악, 갈동, 대야면이 있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악, 갈동, 대야면이 합쳐 비로소 월야면이 신설됩니다.
이때 약간의 지역간 조정이 있게 되는데 월야면으로 편입된 지역을 보면 용월 양정리에 해보면 성산 일부가, 정산리에 해보면 문암일부가, 예덕리에 삼서면의 반학 일부가, 월악리에 죽산 일부가, 외치리에 삼가면의 일부가 편입되었고 편출된 지역은 월악면 용촌 일부가 해보면 용산리로, 대야면의 복룡 일부가 해보면 금덕리로, 갈동면 내기 일부와 월악면 외치 일부가 광산군 삼도면 양동리로, 월악면 고와, 복만 일부가 본양면 덕림리로, 월악면 주곡 일부가 삼서면 금산리로, 대야면 연정, 용계, 신월, 신평, 팔기 전역이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로 편출되었다. 월야면이라는 이름은 월악과 대야에서 한자씩 따서 월야면이 되었습니다
마을유래
◈ 양정리 양지(陽地)
이 마을 역시 마(馬)씨가 번창히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부자로 살았기에 99칸 집이 있었다 한다. 그 후 입향한 성씨는 나주정씨인데 정지아(鄭之雅)가 아버지 훈(薰)이 단종 복위에 연루되 화를 입게 되자 각처로 분산될 때 호남 경차관(敬差官)의 신분으로 서울 남산 밑 입정방(笠井坊)의 터를 버리고 1460년(세조 6년) 양정리 석화산 아래에 은거 정착했다.
그 후 귀양이 풀린 후도 말년을 함평에서 보냈다 한다. 그리고 1680년경에 천안전씨 이제(以悌)가 현 나주군 문평면 산호리 남산 마을에서 옮겨와 정착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햇볕이 잘다는 쪽은 양지(陽地), 햇볕이 들지 않는 쪽은 음지(陰地)라 하였으나 지금은 이를 합쳐 양지(陽地)마을이라 한다.
◈ 양정리 방축(方丑)
삼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고 현존 성씨 중에서는 전주이씨가 200여 년 전에 맨 먼저 입촌했으며 그 후 남방양씨가 150년 전에, 충주지씨가 140년 전에 옮겨와 정착했다. 현재는 14성씨가 살고 있다.
조선조 말까지는 갈동면 "갈월(葛月)"이라 했으며 현재는 "방축(方丑, 1912년 지명)"으로 쓰고 있는데 처음에는 "방축(芳築)"으로 썼다. 마을 이름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에 방축제(方丑堤 : 1945년 설치)가 있는데 예전에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큰 방축(방죽의 원말)이 있었다 하며 방축이 있으므로 해서 현재의 지명이 됐지 않았나 생각된다.
◈ 양정리 기전(基田)
나주정씨 정지아(鄭之雅)의 후손인 정운영(鄭雲榮)이 1800년대 초 경에 양정리 양지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왔으며 그의 아들 열(說)은 천석군 부자로 이름이 났다 한다. 마을 내의 지명 중 "노루목"이라 부르는 곳에 1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마을이 번창할 때는 20여 호가 거주하던 때도 있었다 한다.
마을 지형이 곡식을 까부르는 그릇인 키같이 생겼다 해서 키 기(箕)자를 써서 기전(箕田)이라 했으며 일제 때 기전(基田)으로 바꿨는데 그 연유는 箕자를 계속 사용할 경우 쑥대밭이 된다 해서 고쳤다. 이 마을 뒤에 "노루목"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 바 200년 전 호구총수 책자에 장항(獐項)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노루의 목같이 생겼다 해서 노루 장(獐), 목 항(項)을 썼으며 노루가 꼬리를 돌아보고 있다 하여 장고미(獐顧尾)라 불리는 지명이 인근에 있으며 흔히 장귀미라 부르고 있다.
◈ 양정리 고정(古亭)
1700년경에는 마을이 없이 정자 한 채가 지어져 휴양처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고정자리(高亭子里)가 보임으로 야산을 일구어 농토로 하려는 농경 정착자가 마을을 이미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나주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항일 의병활동을 했던 정헌면(鄭憲冕, 1846~1921)이 이 마을 태생이다. 함평이씨가 1906년에, 나주임씨는 1949년에, 선산김씨는 1955년에 들어와 살고 있다.
1912년 지명에는 고정(古丁)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옛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고정(古亭)"으로 불렀다 한다.
◈ 영월리 덕령(德嶺)
정지아(鄭之雅)의 후손인 나주정씨 정이상(鄭以商)이 인근 양정리 양지마을에서 거주하다가 광산김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1500년대 초경에 이 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그리고 마을 북쪽 700m 쯤에 지아막골(기와막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덕령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성막동(成莫同)이 1958년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큰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대성동(大成洞)이라 하였으며 예전에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 하여 현재 3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 뒤 덕령제(堤) 옆에 "알매(알뫼, 卵山,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그 곳에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오며 만석꾼, 천석꾼부자가 살았다 한다. 지금도 그곳에 옛 사기그릇 파편과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칠봉산(七峯山)의 한자락이 마을 뒷산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칠봉산 너머에 유덕군자(有德君者)가 날 터라 해서 큰덕(德)자와 재령(嶺)자를 써서 "덕령(德嶺)"이라 했었다는데 후에 원뜻과 다른 "덕령(德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으로 표기되었다.
◈ 영월리 석보(石堡)
마을이 형성되기는 400년쯤 된 것으로 전해오며 어느 성씨가 처음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 성씨 중에서는 나주정씨 정창후(鄭昌後)가 1600년대 말경 월야면 양정리 양지 마을에서 맨 처음 들어왔으며 이 마을에 살던 하동정씨 한 사람이 외곡(外穀) 5百여 석을 받고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은 칼같이 생겼다 하여 검뫼(劍山, 1789 호구총수 지명)라 부르던 마을이 먼저 생겼는데 뒤에 옥미리(玉米里 1912년 지명)라 고쳤고 월턱산 북쪽에 돌로 된 보가 있다하여 석보(돌보, 石堡)란 마을이 생겼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두 마을을 합쳐 석보(石堡)라 했다.
◈ 외치리 백야(白野)
500여 년 전에 장(張)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진주정씨 충장공 화(璜)의 후손 함일(咸一)의 아들 정경득(鄭慶得)이 1500년대 말경에 본면 월악리에서 옮겨 왔는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으며 군내에서 진주정씨 집단마을로는 으뜸이다.
원래 마을 형국이 반월체(半月 )라 해서 달이 뜨니 밝다는 뜻에서 흰백(白)자와 밤야(夜)자를 써서 "백야(白夜)"라 했다는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동촌, 남촌, 상촌, 중촌으로 되어 있고 지금도 일부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백야(白也)로 표기했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백야(白野)로 썼으며 "온배미"라고 흔히들 부르고 있다.
마을 주위에 있는 외치제(外峙堤)는 "남생이방죽"이라고 하는데 남생이가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작매, 도롱굴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중 장작매는 장자가 살았다 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 외치리 외치(外峙)
외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때부터라고 전하며 처음에 이 마을을 이룬 성씨는 봉(奉)씨였고 그 뒤 오(吳)씨들이 자가일성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나 현재 그의 후손들은 단 1호도 없고 1600년대 말경 진주정씨 정수증(鄭遂曾)이 본면 월악리에서 옮겨와 정착했다.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 다음으로 함평이씨가 250년 전에 여양진씨가 35년 전에 입촌했다. 1983년 5월 적벽돌 제조업체인 광일연와 공업사가 이 마을에 들어섬으로 해서 30여 가구가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마을형국이 꿩 5마리가 앉아있는 것 같다 해서 오치(五雉)라 했었다 하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외치(外峙)로 표기돼 있다. 이 마을은 광주직할시와 인접한 마을로 면내 자연마을 중 유일하게 재(峙)를 넘어야만 가게 되는데 재(峙)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외치(外峙)라 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월야리 전하(田下)
언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문헌이나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이 마을 좌측에 "광대묘실"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지며 이곳에 "장터시암"이라 부른 둠벙이 있는바 장(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성씨들의 입향년대는 진주정씨, 광산김씨가 맨 먼저 입촌했고 이어 함평이씨, 풍산홍씨, 전주리씨, 동래정씨, 하남정씨가 1800년대 말경부터 일제때에 걸쳐 입촌해왔다.
1922년에 마을 앞으로 광주~법성간의 도로(국도 22호)가 트이고 6 25동란 후 면소재지가 평촌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겨 옴으로 해서 20여 호의 조그마한 마을이 260여 호가 넘는 마을로 번창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밭이 많았다하여 마을 뒷산에 밭이 있었던 흔적인 밭두렁이 군데군데에 그 형태가 남아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연하도수(蓮荷倒水)형국이라 한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전하뫼(田荷山)"로 불러오다가 원뜻과 다른 "전하(田下, 1912년 지명)"로 표기되었다. 월야 입구(入口)란 지명은 면사무소가 평촌마을에 있을 때 면소재지로 가는 길목이어서 부르게 된 지명이다.
◈ 월야리 순촌(蓴村)
원래 이 마을은 함평노(魯)씨가 이루었는데 진주정씨 황(璜)의 아들 함도(함평 입향조)가 노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순촌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진주정씨 정희득(鄭希得, 해상록:저자) 후손들이 2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약 30년 전에 마을 가운데에 500년 이상 되었을 느티나무 1그루가 있었는데 고사(枯死)하고 없다.
이러한 일들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마을이 형성되기는 5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이 마을은 풍수지리의 형국이 운중반월(雲中半月)이며 노(魯), 정(鄭), 이(李)씨의 터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율촌(栗村, 밤까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으며, 그 후 마을 앞 저수지에 순채(蓴菜)가 자생하여 이것이 상감의 진상품이 되고부터 마을 이름이 "순촌(蓴村, 1789년 호구총수 지명)"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저수지에 순채가 자생하고 있다. 예전에 이곳은 영광에서 광주로 가는 도로변으로 앞주막, 뒷주막이 있었으며 마을 또한 번창했다. 벼슬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양반마을로 유명하여 사람들이 좀 까다로웠다 한다. 1789년 호구총수 지명, 월촌과 순촌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두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월야리 송계(松溪)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250년 전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70여 년 전 인근 괴정마을에서 진주정씨 정종악(鄭鍾岳)의 손자인 용근(龍根)과 동교(東敎)가 옮겨왔으며 그들이 입주하기 전에 최(崔)씨, 파평윤씨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단 1호도 없다. 이 마을은 소나무만 무성한 야산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송계(松溪,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고 하였다.
◈ 월야리 동산(東山)
조선조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禦侮)장군을 역임한 정종문(鄭宗文)이 당시 인근 마을인 내동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 이 마을에서는 6·25동란 전만 해도 20여 호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화로 불 타버리고 지금은 겨우 9호만이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이 마을은 내동 마을의 동쪽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동산(東山,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고 했다 한다.
◈ 월야리 괴정(槐亭)
진주정씨 정희득(鄭希得, 海上錄 저자)의 아들인 적(??, 호 : 楓)과 아(我, 호 : 栗浦)가 마을 가운데 길을 사이에 두고 윗마을은 노상(路上), 아랫마을은 노하(路下)로 부르면서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0년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희득도 아들들이 살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마을에 살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리고 지금은 거주 호수가 7호에 지나지 않지만 40여 년 전에는 15호가 살았으며 이제 마을 규모가 작아 자연마을으로는 "송계(松溪)"마을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570여 년 전에 진주정씨 선조 삼형제가 부친의 수연일(壽宴日)에 느티나무정자(槐亭)에 병괘사인(倂掛四人)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부친인 함도(咸道)는 함종현령이며, 장자인 유(維)는 고산현감이고 차자 면(綿)은 횡성현감이며 삼자 주(紬)는 무안현감으로 사부자(四父子)가 이 정자에 인(印)을 걸었다하여 사인정(四人亭)이라 하였다 하는 유래가 있는바 정자(亭子)이름이 괴정(槐亭)이란 마을 이름이 된 것 같다.
정자는 현존치 않으며 수령이 600년 이상 됐을 느티나무 1그루가 마을 앞에 있다. 조선시대 철종조때 승지(承旨)를 역임한 정종악(鄭鍾岳)의 아들인 복원(復源)과 손자인 성근(成根)이 천석군부자로 이름이 났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설에 가마형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 월야리 평촌(坪村)
이 마을은 월악면 평촌리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월야면 월야리가 됐으며 몇 호에 불과했던 마을이 한일합방 이후부터 6 25사변 전까지는 월야면 소재지로서 면사무소, 함평경찰서 월야주재소, 월야보통공립학교가 있어 번창했으나 전화로 불타 소재지가 전하로 옮겨갔으며 6·25이후 월야중학교(53년 4월 7일 개교)가 세워질 때 28호가 떠나고 월야고등학교(72년 12월 26일 개교)가 세워질 때 8호가 떠나는 등 마을이 줄어들었다.
이 마을은 어느 성씨가 맨 먼저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함평이씨가 60여 년 전에 밀양박씨가 1930년경 진주정씨가 1933년, 전주리씨가 1943년, 동래정씨가 1950년경, 반남박씨가 1963년에 각각 입촌하였다.
평평한 들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평촌(坪村,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불렀으며 "중보(中堡,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고도 불렀는데 고막천에 있는 지와보와 소림보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였다 한다.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두 마을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에 두 마을으로 분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월야리 장동(長洞)
일제때 국도(22호)가 면소재지 앞으로 트이기 전에는 광주 영광간 도로가 마을 앞에 있었으며 수박동(水泊洞)이라 부르는 곳에 장(場)이 있었다 하는데 현 문장시장이 이곳 장에서 구장터(용암리 용산 마을 뒤)로 옮겨갔다가 해보면 문장리 무내미(매래미장)에 다시 옮겨졌으며 192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개장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장(場)이 있었을 당시인 100여 년 전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 같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 밀양박씨 박우현(朴禹玄)이 50여 년 전에 해보면 중귀마을에서 옮겨와 수박동에 맨 먼저 터를 잡았다하며 장석골이라 부르는 곳에 인근 평촌마을에서 임장춘(林長春)의 둘째 아들 임석원(林碩源)이 결혼 후 분가하면서 1930년대말 경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 후 나주정씨와 평산신씨가 1940년 경에 진주정씨가 일제 말경에 들어왔으며 그리고 평촌교(1969년 완공) 건너 들판에 춘부동(春夫洞, 1789, 1912지명, 대야면)마을이 있었는데 수해로 인해 거주키 어려워지자 1963년 장석굴과 수박동 사이에 20여 호가 이주해 옴으로 해서 현재의 마을 규모를 이루게 됐다.
춘부동은 1971년 경지정리로 폐촌됐다.
◈ 월야리 금석(金石)
함평노씨 노신(魯愼)의 후손인 노연길(魯淵吉)이 1850년경 함평읍 진양리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옮겨와 터를 잡았으며, 예전에 조씨가 마을 뒤편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동래정씨가 1909년에 진주정씨가 1910년에 입촌했다.
어떤 지관이 이 마을에 금이 놀고 있다 해서 마을 이름을 "금석(金石,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 짐석동(금석동의 사투리)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85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월야리 4구가 됐는데 이전에는 월야리 1구였다.
◈ 월악리 지변(池邊)
동래정씨 정운길(鄭雲吉, 의금부도사)은 임진란 때 상주에 살면서 정기룡(鄭起龍) 장군과 합세하여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지략을 다했는데 1595년경 외가가 있는 내동 마을에 와 살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영광의 우치(현 장성군 삼서면 우치리)에 왜적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청장년들을 모아 진군하여 싸우다 아들 돈(燉)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자 재흥(再興)은 왜적에게 붙들려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7년만인 1604년에 귀국하여 현 지변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동래정씨 세거지로써 자작일촌하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깊고 넓은 남생이 연못이 있었고 연못 주변에는 정자나무가 자라고 있어 마을을 형성하는데 적격인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하며 연못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지변(池邊, 못갓)"이라 했다 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엄청난 화를 막기 위하여 월악산이 스스로 무너져 연못은 매몰되었고 정자나무도 연못과 함께 매몰되었으나 1그루(느티나무)가 존속되어 노거수로 지정되어 있다. 연못이 매몰되면서도 마을에 화가 없었던 마을이라 명촌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연못이 매몰된 주변 들을 "강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 월악리 내동(內洞)
이 마을은 고려 때 충의사인 함평노씨 신(愼 咸豊君)이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며 은거하던 곳으로 그가 매월 초하룻날이면 산에 올라가 멀리 북쪽의 송도를 바라보며 곡배하고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이 산을 월망악(月望岳) 또는 월악(현재의 지명)이라 불렀다 한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진주정씨 충장공 황파(忠莊公 璜派)가 군내에서 첫 입향한 곳으로 황의 아들 함도(咸道)가 함평노씨 신의 아들인 유안(有顔)의 사위가 되어 내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함도는 1353년(고려 공민왕 2년) 송도(현 개성)에서 태어나 1421년(세종 3년) 월악리 내동에서 타계했는데 그가 1400년에 함종현령을 역임했으며 관직을 그만두고 내동에 입촌한 것은 1405년경이 된다.
그러나 마을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인돌이 분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래기 12동네 중앙에 있어 "안동네(내동 內洞)"로 부르게 되었다. 내동, 지변, 순촌, 송계, 괴정, 연당, 죽산, 봉덕, 전하, 금석, 백야, 외치를 다래기 12동네라 부르며 이 지역은 옛 월악면 관할구역으로 월악(月岳)을 달월(月)자의 색음을 따서 "달악(다래기)"이라 불렀다.
◈ 월악리 성주(城州)
진주정씨 정의원(鄭義源)이 1800년대 중순경 인근 내동마을에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다.
원래 이 마을은 내동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1980년에 자연마을으로 분리되면서부터 마을 이름을 "성주(城州)"라 부르게 됐는데 성주라 한 것은 마을 동쪽 500여 m 쯤에 월악산이 있는데 그 산상에 월악산성(백제 때 쌓은 토성으로 지금은 폐성됨)이 있어 성(城)자와 이 마을에서 진주정씨가 많이 살고 있어 주(州)자를 따서 성주라 했다. "밭다래기"라고도 부르는데 다래기인 내동지변 마을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월악리 봉덕(鳳德)
300여 년 전 평산신씨가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 진주정씨 황의 후손 정종길(鄭鍾吉) 삼형제가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에서 옮겨와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 다음으로 남평문씨가 45년 전에 입촌했으며 그 후 청송심씨, 광산김씨, 김해김씨, 나주정씨, 전주최씨, 영동김씨의 순서로 들어왔다.
마을의 지형이 봉황새처럼 생겼다 해서 마을 이름을 "봉덕(鳳德,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으며 마을 뒤 부봉산 중턱에 1906년부터 50여 년 동안 성암선생(省庵先生:鄭炳休)이 학장을 한 봉산제가 있는데 지금도 흔히들 봉덕서당이라고 부른다.
◈ 월악리 노동(鷺洞)
1600년대 말경 김해김씨 김처기(金處基)가 함평군 손불면 대전리에서 살다가 열세 살 때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던 끝에 이 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천년은 안주할 곳이라 생각하고 열다섯 살 때 전주이씨의 딸과 결혼하여 삶의 보금자리를 이루고 살았으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신성(新城), 녹동(祿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어떤 지관(地官)이 이 마을의 지형이 백로(白鷺, 해오라기) 형국이라 하여 "노동(鷺洞, 1914년 행정구역 지명)"이라 했으며 마을 이름에 걸맞게 전에는 백로가 마을 앞에 둥우리를 치고 많이 살았다 한다.
◈ 월악리 연당(蓮塘)
이 마을 첫 입향조는 진주정씨 정태일(鄭泰一)로 그의 부 정종순(鄭宗舜)이 영광군 대마면 군동에 살면서 아들 5형제를 낳았다.
그중 막내가 월악리 내동 마을로 옮겨왔다가 다시 이 마을로 이거하여 광산김씨의 딸을 맞아 정착했는데 그때가 1500년대 중순경이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김해김씨 1호가 1910년에 입촌했으며 해평길씨와 순흥안씨가 1호씩 살고 있는데 근래에 들어왔다.
이 마을은 오목한 소쿠리형이며 마을 앞에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서 연꽃이 피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해서 연꽃 연(蓮)자와 못 당(塘)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연당(蓮塘, 1789년 호구총수 지명)"이라 했다.
◈ 월악리 죽산(竹山)
진주정씨 충장공 황(璜)의 후손인 정성(鄭晟)은 월악리 내동 마을에서 출생하여 조선시대 선조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시강원 설서(侍講院 設書)로서 세자(世子)를 강의하였는데 인조조 때 하향하면서 고향인 내동 마을에서 거주하다가 1600년대 초경 이 마을로 옮겨왔으며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마을 앞 돌뫼지석묘군 옆들을 청계동(淸溪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논을 갈 때 깨진 옛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1985년에 경지정리가 됐으며 솔대를 꽂는 돌이 발견됐다. 아마도 이곳 일대는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 주거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해서 "죽산(竹山)"이라 했으며 "대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월악리 죽산 마을을 함평 대매라 하며 인근 삼서면 금산리 죽산 마을을 장성 대매라 부르고 있다. 장성군 대매도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성군 삼남면(森南面)이었다가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 계림리 시목(枾木)
야산이었던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함평이씨로 이석헌(李錫憲)이 1800년대 말경 월야면 정산리 서촌 마을에서 옮겨 왔다. 그 후 마을 앞 들판에 와촌(瓦村)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왜촌(倭村)이라 부르던 곳으로 1901년(辛丑年) 홍수로 인해 거주하기가 어려워지자 맨 먼저 흥성장씨 장성오(張成五) 일가족이 옮겨 왔으며 그 후 연차적으로 천안전씨, 청송심씨, 제주양씨 등이 그곳에서 옮겨왔다.
와촌마을은 6·25사변 이후 폐촌됐으며 마을 앞 도노들은 1972년과 1973년에 경지정리가 되었다.
일제 때 이 마을에 일본인 1호가 살았다 한다. 감나무가 많아 "시목(枾木)"이라 했다하나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이 마을에 몇 그루 밖에 없었다 하며 시목이라 하기보다는 마을 형국이 활이기 때문에 화살 시(矢)자를 써서 "시목(矢木)"이라 해야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 주민들의 의견이다.
이 마을은 옛 대야면의 관할구역으로 1911년도 대야면 2기 호세장부를 보면 시목에 16호, 와촌에 4호가 거주한 기록이 있다.
◈ 계림리 주전(柱田)
언제 어느 성씨가 맨 먼저 터를 닦았는지는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현존 성씨 중에서는 1900년대 초경에 동래정씨, 김해김씨, 광산노씨, 현풍곽씨가 입촌했으며 상산김씨, 밀양박씨, 영성정씨, 금성오씨, 문화유씨, 칠원윤씨, 경주리씨, 남양홍씨, 죽산안씨 등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행주(行舟)라는 명당설에 배를 매두는 선창가라 하여 주전(舟田)이라 했는데 지금은 원뜻과 다른 "柱田"으로 표기하고 있다.
◈ 계림리 가차(加次)
이 마을은 200년 전 전주리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후 진주강씨 강낙원(姜洛元)이 인근 마을인 계림리 죽림(옛 竹洞)에서 1800년대 중순경에 옮겨 왔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 김해김씨가 1900년경에, 죽산안씨가 1910년경에 입촌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주변 일대가 달리는 배형국(行舟)이라 하는데 이 마을은 큰 배의 키(치)로 배에 키를 하나 더 달았다 해서 가치라 했다 하는데 후에 가차(加次)로 표기되었다 한다. 그런데 1789년 호구총수 명에 가차암(加次岩)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이 지명에 상당히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가치, 대치로 나뉘어 불러오다가 가차로 통일했는데 대치는 큰 배의 치라 하여 불렀던 명으로 현재 5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진사(李進士)가 살았다 한다.
이 마을은 행주(行舟)란 명당 집터가 있다 해서 집터를 잡아 부자들이 욕심을 낸 곳인데 옛적에 어느 중이 나타나 타지의 물이 마을 앞으로 흐를 때 더바람이 날 것이라 했다고 하며 영산강유역 개발로 인하여 큰 용수로가 생겨 물이 흐르게 되어 터바람이 날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 계림리 죽림(竹林)
함평노씨 노택동(魯宅東)이 1700년대 중순경 함평읍 진양리에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으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함평노씨 다음으로는 하동정씨가 약 90년 전에, 나주임씨가 약 70년 전에 입촌했다.
함평노씨가 터를 잡았을 때 어느 지관이 "이곳은 물버큼터이며 북풍이 강하여 살기 어려울 터이니 대나무를 심어 북풍을 막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 되었고 대숲이 죽림(竹林)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은 원래 "죽동(竹洞 1912년 지명)"과 "죽림"으로 나누어 불리었으나, "죽림"으로 통일하였으며 1911년 대야면 2기 호세장부를 보면 죽동에 12호, 죽림에 14호가 거주한 기록이 있다.
◈ 계림리 금치(錦峙)
흥덕장씨가 300여 년 전에 입촌하여 정착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150년 전 그 후손 중에서 판관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 하며 계동(桂洞)이라는 마을에서 성(成)씨가 천석꾼부자로 3대를 살았다 한다.
1912년 1914년 행정구역명을 보면 금치(金峙)로 표기되어 있는데 마을 뒷산이 옥녀형국이고 산봉우리를 옥녀봉이라 부르는데 옥녀가 비단을 짜는 곳이 마을터라 하여 현재는 비단 금(錦)자를 넣어 마을 이름을 "금치(錦峙)"라 했다.
마을 앞 들을 옥녀가 베짜는 북이라 해서 신저골(新 谷)이라 했는데 신죽굴로도 부르고 있다. 마을내 지명중 구룡목(龜龍)은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와 접하고 있는데 거북 형국과 용 형국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5호가 거주하고 있다.
◈ 예덕리 예동( 洞)
500여 년 전 지금의 불흥사 자리에 예슬( 洞, 슬은 마을, 마실, 마슬의 의미)이란 마을이 있었고 주(周)씨가 살았는데 화적의 피해가 심해 폐촌되었다.
그 후 지금의 예동에 심씨가 터를 잡아 세거하였으나 현 안갑오씨의 집터에서 "심망석(沈亡石)"이란 글이 새겨진 돌이 나온 후 심씨는 이촌했으며 죽산안씨 안희민(安希閔)이 1580년경 광산군 서창면 매월리에서 이거해온 이래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는 셈이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죽산안씨 다음으로 전주리씨가 150년 전에, 밀양박씨가 120년 전에 입촌했으며 밀양박씨, 청주한씨, 달성서씨, 해주오씨, 함평이씨, 곡부공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대구배씨 등이 살고 있다.
불흥사 자리에 있었던 "예슬( 洞)"이란 마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현재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전에는 여우가 많이 산다해서 호동(狐洞)이라 했다.
◈ 예덕리 신촌(新村)
250년 전 죽산안씨가 인근 예덕리 예동 마을에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누가 처음 입향한지는 알 수 없고 현존 성씨 중에서는 죽산 안씨 다음으로 인동장씨가 120년 전에, 순흥안씨가 90년 전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망태골"이라 불렀는데 이는 망대골(望大谷)의 발음이 잘못된 것이며 망대(望大)라 한 것은 고려 충혜왕때인 134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고 죽성군(竹城郡, 竹山의 옛 이름)에 봉작된 신 죽산안씨의 1세조 안원형(安元衡)의 16세손인 안형직(安衡稷)이 참의벼슬을 한 것을 기념으로 예동마을의 입구인 이 마을에 솟대(솔대)를 세웠는데 이 솟대가 높이 세워져 있어 근처에서 바라보아 우러러보니 큰 것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대라 했다 한다.
그 후 150년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신촌(新村)"이라 부르게 됐으며 예동 마을과는 한 마을이었으나 자연 마을이 되면서부터 신촌이라 불러 분리시켰다.
◈ 예덕리 신덕(新德)
이 마을 서북쪽에 약 100m 지점과 남쪽 300m 지점에 백제시대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 주변 일대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지금도 밭을 갈 때에 깨진 옛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장과부가 부자로 살았다하며 이 마을 출신으로 150여 년 전 함평이씨 이돈하(李敦夏)는 함평 향교 도유사를 지냈으며 100년 전 이장옥(李章玉)은 한의사로 멀리까지 이름이 났다 한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90여 년 전에 광산김씨 김상진(金相震)이 월계리 덕산마을에서 맨 처음 옮겨 왔다.
예전에는 마분정(馬墳亭 1789년 호구 총수지명)이라 했는데 말무덤, 몰무덤 등으로 불리어오고 있는 지명으로 고분지대로 밝혀지고 있으며 현 신덕 마을에도 백제 고분이 있다. 마분정은 고분이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중간에 폐촌되었다가 100여 년 전 예덕리에서 새로 성촌된 마을이란 뜻에서 마을 이름을 "신덕(新德 1912년 지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 동쪽 들을 홍정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홍씨의 정자가 있었다는 지명으로 예전에 이 마을에 홍씨가 살았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예덕제(堤)에 잠겼는데 홍시암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다 한다.
◈ 예덕리 만가(万加)
이 마을 구릉에 마한의 전통을 이어 받았을 백제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선사시대까지 거스를 수도 있다. 현 신성연와산업에 입주하기 전에는 7호가 살고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섬으로 해서 헐리고 2호가 남아 있다. 모(牟)씨, 정(鄭)씨, 박(朴)씨, 이(李)씨가 살았으며 50여 년 전에는 20여 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한다.
전언에 의하면 불갑산( 甲山) 동쪽 십리 밖에 가히 만인이 살 곳이라 해서 "甲東十里 可治万人之地"라 했다하며 노씨, 이씨, 장씨가 만호를 이루고 살것이라 하여 "魯李張 万家村"이라 했다한바 만가(万家)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연유된 듯 하며 1789년 호구총수와 1917년 조선면리 동일람 책자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 때부터 부르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군의 주요한 문화 유적지인 예덕리 고분군을 축조하였던 당시는 이곳 일대에 큰 세력 집단이 웅거하고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고분군을 피한 동쪽에 만호를 세울 수 있는 신성연와산업(1984년 5월 개업)이 들어서고 보니 지명 만가의 불가사의가 이야기 되고 있다.
◈ 예덕리 발산( 山)
1984년에 마을 주민에 의해 반월현 석도가 발견됐으며 마을 입구 야산에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김해김씨 김학표(金學杓)가 130년 전에 과산군 동곡면 유계리에서 맨 처음 옮겨왔으며 인동장씨와 밀양박씨가 100여 년 전에 입촌했다.
광산김씨, 창원황씨, 전주리씨, 진주정씨, 청주한씨, 초계변씨, 순흥안씨, 영성정씨 등도 살고 있는데 예전에 금성나씨와 안동권씨가 살았다 하며 금성나씨 한분이 일제 때 이 마을에서 한약방을 했으며 50년 전에 떠났다 한다.
◈ 예덕리 무봉(武奉)
파평윤씨 윤상술(尹相述)이 월야면 월계리 덕산(서당골) 마을에서 살았었는데 1800년대 말경 영성정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소유하고 있는 농경지가 이 마을에 있어 경작에 편리하도록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러나 봉산(奉山 1912년 지명)으로 불리는 곳에 마을이 먼저 형성됐다 하며 이곳에서 옹기그릇을 생산했는데 6 25사변 이후 폐요됐으며 지금은 단 1호도 거주치 않는다.
무봉에는 전에 최씨, 문씨, 이씨, 박씨 성을 가진 자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원래는 무선(武仙 1912년 지명), 봉산(峯山 1912년 지명)으로 각각 불리어오다가 1959년 이 마을 북쪽에 무봉제(武奉堤)가 설치되면서부터 "무봉(武奉)"이라 부르게 됐는데 무선은 두 선녀가 춤추는 형국, 즉 선인무수(先人舞手)라 해서 무선동이라 불렀다 한다.
◈ 정산리 내정(內亭)
1600년대 초경에 전주리씨 정종(定宗)의 현손인 화림부수(花林副守)가 임진란 때 출전하여 전사하고 미망인 백천조씨가 아들 인, 의 형제를 데리고 와 정착하였는데 현재 그의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북쪽에 있는 바우등은 고인돌이며, 예덕리 만가촌 고분군과는 1km 거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일대는 마한 때부터 농경 집단이 정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이다.
마을 앞에 정자나무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내정자(內亭子 1789호구 총수 지명)"라 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인해 정자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몇 그루만 남아 있다.
◈ 정산리 화산(花山)
전주이씨 이상인(李象寅)은 이이원(李以遠)의 4남으로 인근 내정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장흥임씨의 딸과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때가 1880년경이며 전주이씨 다음으로 나주오씨가 1800년대 말경 입촌했다.
예전에는 마을 지형이 한 쌍의 누에머리형국이라 하여 "잠두( 頭)"라고 했었으나 이 마을이 칠봉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온 곳에 형성된 마을이고 칠봉산의 그 자락을 진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진등은 칡넝쿨 형국이며 이 마을은 칡넝쿨에 핀 칡꽃(葛花)에 해당되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화산(花山)"으로 해야 된다는 어느 지관의 말에 따라 그렇게 부르게 됐다 한다.
◈ 정산리 신기(新基)
이 마을은 영광 장성, 함평 어디에 보아도 사방칠봉이라는 내용맥(來龍脈) 하단에 위치한 마을로서 1789년에 발행한 호구총수 책자에 신기(新基) 마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200년 전에도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800년대 초경 함평이씨 이진택(李鎭宅)이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두동 마을에서 살다가 처(밀양박씨)와 함께 입촌하였으며 차남 유순(孺淳)이 진사벼슬을 한다.
그 후 120년 전에 정산리 내정 마을에서 동래정씨 1호,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에서 청송심씨 2호,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에서 여양진씨 1호, 정산리 내정 마을에서 전주이씨 1호가 각각 들어 왔으며 일제 때는 일본의 북천(北川), 평목(平木) 성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다가 해방 후 떠났고 영광군 불갑면 순용리 용매 마을에서 불갑저수지 건설로 1920년경에 고흥유씨 1호가 이주해오자 계속 7, 8호가 들어 왔으며 1922년경에 인동장씨가 월계리 덕산 마을에서 옮겨 왔다.
이어서 여양진씨 2, 3호가 들어오고 연안김씨가 1938년에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에서 옮겨 왔으며 밀양박씨, 한양조씨, 김해김씨, 영성정씨도 각각 1호씩 살고 있다.
새터라는 뜻으로 신기(新基)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음을 알 수 있으며 120여 년 전 여러 성씨들이 입촌하여 마을 규모를 갖추게 되면서부터 마을 중 상촌에 좌청룡으로 쉬나무를 심었고 하촌(산정동)과의 사이에 우백호로 석비를 세움과 동시에 정자나무와 백일홍나무를 심고 그 옆에 동각(洞閣)도 지었으나 8·15해방 후 없어지고 쉬나무와 석비만 남아 있다.
◈ 정산리 동촌(東村)
이 마을은 언제 어느 성씨가 터를 잡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다만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 중에서는 1700년경에 광산군 하남에서 현풍곽씨 곽희수(郭禧守)가 처음 입촌하여 정착했으며 그 후 김해김씨가 1800년대 중순경 들어 왔다.
원래 이 마을의 서쪽에 서촌(西村 1789년 호구 총수 지명) 마을이 있어서 "동촌(東村)"이라 했다. 그리고 마을 뒤에 절의 강당(講堂)이 있던 곳이라 해서 강당밭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용하던 북이 현재 영광군 불갑사( 甲寺)의 북이라고 전해온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 정산리 장교(長橋)
전 대야면장을 지낸 함평이씨 이계송(李啓宋)이 인근 정산리 서촌 마을에서 살다가 1920년경 이 마을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으며 그 후 죽산안씨, 동래정씨 등이 입촌하여 방앗간, 한약방 등을 운영하였다. 이 마을은 장성 방면에서 문장(文場)으로 통하는 도로(국도 24호)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월야면 상구 일원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로서 6·25사변 이후 연차적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1960년대 초경에 동촌마을에서 자연마을으로 분리되면서 돌로 된 긴 다리가 이 마을에 있었다 해서 "장교(長橋)"라 했으며 흔히들 진다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옛부터 이곳이 달(月)이 진 형국이라 해서 "진달"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이 마을 동편에 동촌마을과 신기마을을 넘어 다니는 재를 월령재(月嶺峙)라 하며 달이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인바 진달이 진다리로 변하여 부르게 됐지 않았나 여겨진다.
◈ 정산리 서촌(西村)
진주정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며 그 후 1700년대 초경 함평이씨 이경익(李慶益)이 나산면 우치리에서 이거하여 정착했으며 타 성씨가 있긴 하나 자작일촌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형국이 서반월(西半月), 즉 서쪽에 떠 있는 반달 같다 해서 "서촌(西村)"이라 했으며 소쿠리형으로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 정산리 고실(古實)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성씨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였으므로 오합촌이 되고 있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정수송(鄭秀松)이 해보면 금덕리 고두 마을에서 50년 전에 옮겨 왔으며 그 후 상산김씨, 광산김씨, 함평이씨, 금성나씨, 전주이씨 순으로 입촌했다.
원래는 마을 형국이 북치고 비파를 탄다 해서 고(鼓)자와 실(瑟, 슬)자를 따서 고실(鼓瑟)이라 불렀었다는데 원뜻과 다른 "고실(古實)"로 표기되었다. 월야면에 폐합되기 전에는 대야면 고신리(古申里)였으며 1911년(明治 44년)도 대야면 2기 호세장부를 보면 3호가 거주한 기록이 있다.
◈ 정산리 영가(永加)
마을이 언제 형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수령이 300년 이상 된 정자나무(감나무)가 있었는데 고목이 되자 15년 전에 파버렸기 때문에 마을 형성 시기는 300년 전쯤 되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추측하고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밀양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70년 전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서 박일용(朴一容)이 옮겨 왔으며 밀양박씨 다음으로 평택임씨, 나주나씨, 함평이씨, 전주이씨, 해주정씨, 죽산안씨, 전의이씨, 제주양씨, 광산김씨가 차례로 입촌해 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풍수지리설에 옥녀포금(玉女포琴)의 명당이 있는데 이 마을은 노래 부르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영가(詠歌)"라 했는데 일제 때 쓰기 쉽게 하기 위해 원뜻과 다른 "영가(永加)"로 표기했으며 1914년 월야면이 신설되기 전에는 해보면 문암리의 일부였다.
◈ 용암리 방하(芳荷)
고려 때 임양덕(林陽德) 장군이 개촌(開村)했다는 전설과 함께 지금도 마을 후록에 임장군묘로 전해 오고 있는 고분이 있으나 그 후손이 현재는 살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임씨 입촌 후 광산노씨 성연(成連)이 광주의 일곡동에서 이거 입촌했다고 하는데 성연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함평향교(당시 함평읍 내교리 외대 소재)를 새로 짓고 자기 집 노복들을 향교의 교직으로 하였던 경덕(憬德, 1562~1612)의 9세조(世祖)로 생존 년대가 정확히 기록되지 않아 정확히는 말 할 수 없으나 대략 1400년대 말경에 입촌 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의 조부 사종(嗣宗)이 동래부사를 역임하는 등 번창한 집안이었다. 함평군사(郡史)에서는 광산노씨 함평 최초 입향을 절효공 6세손 상지(尙枝)가 아들 극창(克昌 1482~1568, 광주 목사 역임)을 데리고 나산면 송암리 음지에 입촌한 것으로 들고 있는데 노성연(盧成連)의 함평 입향은 200여년을 앞서고 있다.
군사 편찬 때 과산노씨들이 방하의 노씨 입촌자료를 제공하지 않은데서 과산노씨의 함평입향이 200여년이나 차이가 나게 한 것이다. 광산노씨 다음으로는 청주한씨와 김해김씨가 입촌했었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골짜기에서 항상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정착했다고 전해오는데 마을 이름은 방아와는 거리가 먼 방하(方下, 上方下, 下方下 두마을, 1789년 호구총수 지명) 후에는 "방하(芳荷 1912년 지명)"로 표기되고 말았다.
이 마을은 월야면이 신설되기 전에는 대야면 방하리라 했는데, 대야면이라 부르게된 연유는 방하 마을이 야(也)자 형국이고 정산리 서촌마을이 대(大)자 형국이라서 이 두 글자를 합하여 면명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 용암리 연화(蓮花)
고려 말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이나 전하는 바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현존 성씨 중에서는 동래정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1700년대 중순경 영광군 염산에서 정윤조(鄭潤朝)가 옮겨 왔으며 동래정씨 다음으로는 전주이씨가 55년 전에 들어 왔다.
그러나 마을 뒷산에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도 이 마을에 사람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조 때 촌중에 묘한 지정(池井)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 마을 이름을 "연화(蓮花)"라 했다고 전하나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이와는 뜻이 다른 연화동(連化洞)으로 표기되고 1912년 지명에는 연화(連花)로 표기되었다.
◈ 용암리 은암(殷岩)
처음에 황(黃)씨가 거부(巨富)로 황씨촌을 이루고 살았다 하나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마을 좌측에서 마을 앞을 가로 질러 흐르는 하천이 있었는데 그 하천을 마을 옆으로 흐르게 해서 황씨는 망하고 그 후 임씨가 살았으며 1700년대 말 경 김해김씨 김성국(金聲國)이 용암리 방하 마을에서 옮겨 왔으며 김해김씨 다음으로 원주김씨 김달옥(金達玉)이 1800년대 초경 해보면 발미 마을에서 옮겨 왔다.
그 후 함평박씨 박 한풍(朴漢豊)이 인근 송정 마을에서 살다가 1870년경 입촌했다. 함양박씨, 원주김씨, 밀양박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나주정씨, 진주정씨, 하음봉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인동장씨, 이천서씨, 연안유씨가 각각 1호씩 살고 있다.
원래 마을 뒷산이 토끼 형국이라 해서 "분토동(奔兎洞)"이라 불러 �는데 1789년 호구총수 책자에 음만 따서 분토동(分土洞)이라 기록해 있으며 이 마을 출신인 한학자 박 한표(朴漢標)의 호인 은암(殷岩)을 따서 마을 이름을 "은암(殷岩)"이라고 했다.
◈ 용암리 신성(申成)
마을 주변에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이미 주거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마을이 이루어진 것은 마을 앞에 명지동(明池洞)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처음 마을이 형성됐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단 1호도 거주치 않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해주최씨가 400년 전에 터를 잡고 살다가 60년 전에 현재의 마을을 옮겨왔다 하는데 진주최씨와 전의이씨도 살았다 한다.
원래는 마을 형국이 말(馬)같다 하여 마감동(馬감洞 1789년 호구총수 지명 고분과 관계가 깊은 지명)으로 불러오다가 대야면 관할구역일때는 "신성리(申成里 1912년 지명)라 했으며 신성(申成)에 대한 지명유래는 전하는바 없어 알 수 없다.
◈ 용암리 용산(龍山)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어느 성씨가 먼저 터를 잡았는지는 전하는바가 없어 알 수 없으며 다만 현존 성씨 중에서 진주최씨 최수필(崔壽弼)이 130년 전에 무안군 일로면에서 옮겨왔으며 그 후 인동장씨가 106년 전에 김해김씨가 42년 전에 함평이씨가 30년 전에 진주정씨는 1984년에 입촌했다.
이 마을 좌측에 안골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함평노씨가 이곳에 터를 닦아 살다가 본면 계림리 죽림마을로 이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 후등이 용의 형태를 닮아 흘러 내려와 이 마을은 용의 꼬리에 해당된다 하여 마을 이름을 "용산(龍山)"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민의 식수로 사용 중인 우물이 마을 앞에 있어 농사철의 농업용수로 쓰이고 있는데 이 우물을 용의 음부라 하고 우물물을 용의 오줌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용정리 송정(松亭)
함평모씨가 이 마을 서쪽에 있는 괴동(槐洞)에 처음 터를 잡았다 하며 정확한 입향년대는 알 수가 없다. 그 후 입향한 성씨는 인동장씨로 장우각(張宇珏)이 1700년대 중순경 이곳이 만인이 웅거할 터라 생각하여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영당 마을에서 옮겨와 정착한 이래 그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함평모씨의 후손은 단 1호도 없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마을 형국이 학(鶴)이기 때문에 학과 관계되는 소나무를 택해 마을 이름을 "송정(松亭 1789년 호구총수명도 동일함)이라 했다. 마을 이름에 맞게 마을 앞 용정제(1966년 완공) 옆에 200년 이상 됐을 벽송 1그루가 있는데 예전에 인동장씨들에 의해서 수백 그루가 심어졌고 그 나무 위에는 많은 학이 앉았다 한다.
현재 남아있는 소나무는 나무가지가 부채살 모양으로 10여 가지로 자라나 마을에 위기가 있으면 활짝 펴진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고 정월 대보름날이면 당산제를 지냈으나 몇 해 전부터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
◈ 용정리 용수(龍岫)
마을 앞에 팽남제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당산제를 지내던 팽나무 1그루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포함 세 번의 난리를 겪었다 한다. 이로 미루어 마을 형성 시기를 4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현존 성씨 중 인동장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인근 송정마을에서 1800년대 중순경 장현국(張鉉國)이 이천서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그 후 함평이씨 이 창헌(李昌憲)이 1853년경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어머니 행주기씨와 함께 들어 왔다.
예전에는 대농소(大農所)라 불렀다하며 1789년 호구총수에 기록이 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책자에 용수(龍岫) 마을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용수란 마을명을 사용한지는 오래돼지 않는 것 같으며, 마을 뒤 석각골에서 용이 승천했다 해서 용수라 했다 한다.
◈ 용정리 복용(伏龍)
이 마을 지명 중 냉천동(冷泉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신(辛)씨가 맨 먼저 터를 잡았다 하며 그 후 현 위치에 제주양씨 양서용(梁瑞龍)이 1700년대 중순경 광산구 박호동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옮겨와서 400년은 안주(安住)할 것이라 하여 영산신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착하였다.
마을 지형이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엎드릴 복(伏)자와 용 용(龍)자를 써서 "복용(伏龍 1789년 호구총수)"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 앞 장성호 1호 간선 아래에 용의 꼬리라 하여 용호철이라 부르는 곳이 있으며 용머리는 인근 용수마을 쪽으로 향해 있다고 한다
◈ 월계리 석계(石溪)
이 마을 구릉상에 선사시대의 유적인 지석묘가 분포된 것을 볼 때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존 성씨 중에서는 광산김씨가 맨 먼저 입촌했는데 1700년대 초 김일삼(金鎰三)이 함평군 대동면 덕산리에서 살다가 창녕조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이 마을을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그 후 인동장씨가 250년 전에 무안박씨와 여양진씨가 200년 전에 함평이씨가 150년 전에 전주리씨가 120년 전에 죽산안씨가 105년 전에 금성나씨가 24년 전에 들어와 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배(舟) 형국으로 마을 뒷산에 "큰뱃재", "작은 뱃재"라 부르는 고개가 있으며 이 마을은 배의 밑 부분에 해당되므로 "배밑"이라고 불러 왔으며 대야면의 관할구역 때에는 석계리(石溪里 1789년 호구총수 지명)라 했다.
이 마을은 지석묘등 돌이 많이 있으며 지금 마을 상수도 물로 쓰이고 있는 밭시암(밖샘)이라는 샘이 돌로 되어 있고 돌 사이에서 시원하고 맑은 물이 나와 흘러 내려간다 해서 석계(石溪)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안에 쇠점고랑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에 쇠점이 있었다고 하며 김씨가 살았다 해서 김정동(金定洞)이라고도 한다.
◈ 월계리 용강(龍江)
이 마을은 파평윤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하며 이어 어양진씨가 현재의 마을 위치보다 100여 m 위쪽에다 300년 전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곳을 쉬나무골이라 부르는데 쉬나무정자가 있었다 한다. 그 후 입향한 성씨로는 대구배씨로 1800년대 중순경 신광면 보여리에서 배환채가 옮겨온 이래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 말결 표현대사가 마을 뒷산(가재봉) 중턱 등잔골이라는 곳에 절을 창건하면서 주변 일대를 살펴보고 이 지역은 후세에 강이 됨과 동시에 용이 승천할 것이라 하여 마을 명칭을 "용강(龍江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는 없음 1912년 지명)"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용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인지 마을 앞에 용강제가 1940년에 설치되었으며 영산강 유역 개발 때 장성호 1호 간선이 생겨 많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로 보아 옛 선현들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으며, 명실상부하게 용강이라는 마을 명칭이 합당함을 알 수 있다.
◈ 월계리 덕산(德山)
현존 성씨 중에서는 풍양조씨 조재혁(趙載赫)이 1600년대 말경 충남 부여군 세도면 기충리에서, 그리고 광산김씨 김유(金瑠)가 1700년대 중순경 인근 석계마을에서 각각 이거해 왔으며 인동장씨가 1700년대 말경 입촌했다. 현재는 인동장씨와 광산김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통주양씨, 함평이씨, 청송심씨, 남양홍씨도 살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서당(書堂)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해서 "서당골"이라 했으며 월야면이 신설되기 전에는 대야면 덕산리였다. "덕산(德山 1789년 호구총수지명)"이라 부르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가 없어 알 수 없다.
◈ 월계리 월계(月溪)
1700년대 말경 광산김씨 김규찬(金圭燦)이 대동면 강운리에서 옮겨와 정착했는데 입촌할 당시 어느 성씨가 살고 있었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
이 마을 북쪽에는 칠봉산이 있는데 그 산하에 이왕골이란 지명이 있는바 조선조 때 이곳에 절이 있었다하며 그래서 이왕골이라 부르고 있다 하며 월계제(1940년 설치)의 윗산에도 옛 절터가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약 55여 년 전만 해도 3층 석탑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그곳을 탑이 있는 절이 있었다 해서 탑선이(탑순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절이 있었을 당시에 절과 가까운 이 마을에 사람들이 살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예전에는 마을의 지형이 소가 꼬리를 돌아보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우고미(牛顧尾)"라 했으며 또한 마을에 동백나무가 많이 있어 "동백정(冬栢亭)"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도 수 백 년 된 동백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다.
대야면 관할구역 때에는 월계리(月溪里 1912년 지명)라 했는데 1911년 대야면 2기 호세장부를 보면 7호가 거주한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