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황진이와 서화담
황진이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면서 길을 버리고 온 것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나의 길로 끊임없이 왔습니다. 길이 그렇듯, 어느 누가 몸을 목적으로 삼고 누가 몸을 소유할 수 있으며 어찌 몸에 담을 치겠습니까? 길이 그렇듯, 몸 역시 우리 것이 아니지요. 단지 우리가 돌아가는 방법이지요."
서화담
"그렇구나, 그렇고말고, 네가 이렇듯, 쪽물같이 더 푸르게 살아 있는 줄 모르고, 유랑 중에 쓰러져 죽었다는 소문이 송도에 파다하다. 죽음이란 두 가지 지, 목숨을 잃는 것과 삶을 잃는 것. 삶을 잃고도 살아 있는 유령들이 이 나라에 가득하다. 네가 쉽사리 죽지 않은 것은, 네가 가진 길의 힘일 것이다. 너는 밀고 또 밀려 늘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길을 밟지 않느냐? 네 몸이 그리 정직하고 깊으니 네 삶의 길도 멀리 멀리 펼쳐져 너를 부를 것이다."
황진이(黃眞伊)
산은 옛 산 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가니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 야 가고 아니 오더라,
대구 기생은, “그 사람 마음 좋은가?”하고 心性을 상대를 했고. 서울 기생은, “그 사람 돈 제대로 쓸 줄 아나,“ 하며 能力을 중시했고, 평양 기생은, “그 사람 돈 있나?” 하고 財物로 사람을 재는 잣대로 삼았다. 대구 기생이 수더분하고 착하다면 서울 기생은 경중 美人 形이요 평양 기생은 그까짓 돈을 쓸 줄 모르고 알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돈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려낼 재간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평양 기방 에 출입했다하면 어떤 꼼쟁이 구두쇄도 거렁뱅이가 되었다. 어느 때 官吏도 선비도 아닌, 남쪽 지방의 닳고 닳은 장사꾼이 배에 생강(生薑)을 한 배 가득 싣고 평양에 왔다가 그만 그곳 기생에 게 걸려들어 마침내 지닌 돈을 탕진하고 쫓겨나면서 신세 한탄으로 詩를 한 수 읊었다.
먼데서 보면 말 눈 같고,( 遠春以馬目) 가까이서 보면 농 창(濃滄)인데 (近視如濃滄) (농창“깊은 물길”) 이도 없는 작은 입이 어찌 맵다 소리 한 마디 없이(兩頰無一齒) 頰...뺨, 협 한 배의 생강을 모두 먹어 치우나. (能食一船薑)
거지 신세가 되니, 妓房에서 12 폭 병풍을 치고 원앙금침에서 기생의 사랑은 물론이요 , 하인들의 우러름을 받던 일은 일장춘몽, 이놈은 안방에서 쫓겨나 부엌의 땔나무 칸에서 새우잠을 자며 또 다른 남자를 끼고 자는 평양기생집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며 찬밥덩이를 얻어먹어야 했으며 .. 다음 놈이 그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을 보고는 한마디 뱉었다.
“불 땔 놈 또 하 나 걸렸구나”
조선의 三大 妓鄕도 아닌 開城 황진이의 잣대는 “그 사람 멋을 아는가?”였으니.... 그까짓 돈이나 위인의 잘 나고 못나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市井 잡배가 천금을 준다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황진이의 마음에 들었다 하면 天下豪傑英雄도 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금을 못 펴도록 했으니 참으로 멋진 妓生이었다 ..
내노라 뽐내는 뭇 사대부 男性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 평생 살다간 통쾌한 人生이었다. 그 잘났다는 사내놈들이란 당대 제일의 멋을 안다는 士大夫들로서 고관대작의 벼슬아치, 고매한 學者, 높은 道學者, 道통한 스님들 비롯해서 영웅호걸, 詩人 墨客이며 풍류가객 등, 名士를 총 망라해서였다.
♥ 황진이가 좋은 배필을 얻어 一夫從事를 못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웃에 열여섯 살 난 소년이 황진이를 戀慕하여 相思病으로 죽었다. 일러 짝사랑이 死因이었다. 사랑이란 예부터 我戀爾愛라 해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연모한다 하여 戀愛라 했는데, 이웃 총각이 황진이에 대한 戀慕의 정을 불살라 태우지 못하고 상사병이 되어 앓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니 이것이 어찌 총각의 잘못이겠는가?
그 少年의 管 위에 황진이의 속적삼을 얹고서야 喪輿가 움직였다. 그것은 황진이의 속살이 닿았던 옷을 통해서 死者와 生者이긴 하나 間接的인 交感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황진이는 총각의 魂靈과 結婚을 한 셈이다.
한사나이가 황진이로 해서 세상을 떳다는 것만으로도 滿天下의 視線과 罪責感에서 헤어나기 어려우며 ............. 이런 사건 이후 다 른 사람을 만나 혼인 할 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
처음기생이 되기 전에는 이렇다하는 집안의 자제와 청혼이 있었다. 막상 결정의 단계에 들면 빼어난 미모 를 흠잡아 美人薄福(미인박복) 이라 하여 퇴짜 아닌 퇴짜를 맞았다. 아버지 황進士와 어머니 진현금(陳玄琴) 사이의 가계를 까탈로 퇴짜를 맞기도 했다. 그래서 황진이는 기방을 찾게 되었고 스스로 머리를 얹고 妓籍(기적)에 올랐다.
그러나 다른 기생들처럼 마구잡이로 살 수청을 들거나 속사랑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보다는 조물주는 이렇듯 才藝와 미모의 황진이를 이승의 어느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 것을 시샘하며 집구석에 들어 앉혀 현모양처로 묻혀 있게 하기에는 심이 차지 않았던가? 훨훨 밖으로 뛰쳐나가 때로는 뭇 사나이들을 농락하고 때로는 내 노라 하는 남정 내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는지도 모른다.....
옛 고려 서울 송도 기생 황진이는 길재의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오니”.... 李穡(이색)의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물러라...... 원천석의 ”흥망이 유수하니 滿月臺도 水草로다............와 같은 高麗 유신들의 懷古歌가 무색할 哀愁의 懷 古의 詩를 남겼다.
눈 속에 만호장안 옛 빛이 새롭고( 雪中前朝色) 차가운 종소리는 쓸쓸도 하다.(寒鐘古國聲) 시름겨워 남루에 홀로 기대니(南樓愁獨立) 흩어진 성곽 위엔 저녁연기만.(殘廓暮煙生)
황진이 “송도를 노래함“ 全部
고려의 유신도 아닌, 또한 고려가 亡한지 몇 백 년이 흐른 뒤 아무 연관도 없는 황진이가 읊은 심회를 어찌 기녀의 詩라고 貶下(폄하)하것노.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 석양이 내려앉는 남루에 올라 고려의 옛 서울이었던 송도를 회고(懷古)하며 애수(哀愁) 싸인 황진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청산리 벽게수(碧 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말라. 일도 창해 하면 돌아오기 어려 외라. 명월이 만건곤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王家의 宗親인 이 창곤(李昌坤)은 벽계군수를 비롯하여 外職에 있으면서도 평생 外道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도도하였다. 그가 사또시절 수청드는 관기의 치마 끝 한번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황진이는 이런 오만한 위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벽계수의 무릎을 꿇리고 싶은 치기가 발동하여 읊은 詩. 청산리 벽계수야... 이다....
은가루를 뿌린 듯 가득한 달빛은 이미 天心을 지나 기울고 있는데, 明月의 애절한 노래 소리를 듣는 이창곤의 구곡간장은 어떻게 녹았을까?
황진이의 띠어난 음색(音色), 월색(月色), 수색(愁色)을 자아내는 데야 벽계수인들 어쩌겠는가?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가니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 야 가고 아니 오더라.
자연과 흐르는 물 을 통하여 人生 無常을 노래했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그녀가 교류했던 당대의 이렇다 할 벼슬아치요, 선비며, 풍류객들, 두자미 같은 풍채와 이태백 같은 詩才에 소동파의 文才를 갖췄다는 저 유명한 浮雲居士 김경원(金慶元)을 비롯하여 직제학, 청정, 漢城 부판윤을 지낸 양곡 소세양, 성리학 태두 서경덕, 30년 벽면 참선한 지족암 만덕禪師, 벽계군수를 지낸 콧대 높은 벽계수 이창곤, 외 많은 영웅호걸들과 한없는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한 지아비를 섬기지 못하는 원천적 그리움과 서린 恨으로 가슴은 항상 출렁 이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혜여 지는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이 마를 새가없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못 견디게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하며, 때로는 독수공방에서 외로움에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런 측은한 여인이기도 했다.
예쁜 아내 둔 남정 네, 한 시도 마음 놓을 날 없고, 잘난 남편 둔 여인네, 평생 눈물 마를 날 없다고 했다. 아름답고 화려했던 세월은 간데없고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올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도 여자 나이 35살이면 서비스업에서 쫓겨나는 금간 나이인데. 기생이란 원래 21살이면 노기(老妓)라 하여 퇴기(退妓)되는 법, 급기야 시름시름 앓다가 곡기를 끊으니 우리역사 기계(妓界)에 前無後無한 명기도 이렇게 일장춘몽으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의 부음(訃 音)이 알려지자 개성 遠近에서 몰려든 弔喪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애도를 했다. 그 중에서도 임백호가 弔喪한 行脚만은 記錄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임백호가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오매불망 그리워했다. 마침 평안도사(平安都事)의 職責을 받고 赴任하던 중 개성에 이르러 황진이부터 찾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黃眞伊가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는 訃音에 그 길로 長端(문산 위쪽 임진강가 이북 쪽) 남정현(南井峴)으로 달려갔다.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황진이 무덤에 손수 술을 따르고는 詩 한 수 읊었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설워하노라.
그리고는 소리 내 어 울었다. 생전에 한 번 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리 일찍 갈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렇게 弔喪한 게 빌미가 되어 그는 平安都事 직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이 되었다. 王命을 받아 막중 한 공직에 부임하던 벼슬아치가 임지에 도착도 하지 않고 기생무덤부터 찾아가 관복(官服)을 입고 구부렁구부렁 무슨 詩를 읊으며 절을 했다니 꽉 막 힌 그 사회의 눈으로 볼 땐 있을 수 없는 파격이었다. 더구나 실오라기 같은 흠집이라도 찾아내어 생사람을 잡는 당쟁(黨爭)의 소용돌이 판에서랴......
그러나 요 지음 한 국적 천격(賤格)들처럼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기억이 없다” “그 런 일없다”고 말을 바꾸며 꼬리를 빼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자기가 한 일에 後悔할, 그런 옹졸한 임백호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고 官服을 훌훌 벗어 던졌다. 황진이의 무덤을 앞에 놓고 生前에 못 만난 것을 실컷 서러워했다. 그의 이 한 편의 詩 만으로도 당시 황진이가 朝鮮땅 名士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음 을 잘 대변하고 있다.
社會的으로 하찮은 천기(賤妓)요, 家庭的으로는 남편 없고 子孫도 없는 孤獨한 人生을 살 다 간 妓女이건만 황진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명색이 識者라는 사람들도 직계 선대의 詩 한편 외우기 힘들다. 그러나 촌 늙은이 땔나무하는 아이부터 내 노라 하는 碩學들까지도 황진이의 詩를 한 수쯤 애창하지 않는 이 없고,,,,,,,,,,,,,, |